리뷰/책 리뷰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 이슬아, 남궁인]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다

Spezi 2025. 2. 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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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 리뷰에서 작성했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를 읽으면서, 앞으로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많이 생겼다. 그 리스트 중에서 제일 먼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은 이슬아 남궁인 작가의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다.

 

2025.02.02 - [리뷰/책 리뷰] -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 김소영] 책이 책을 부른다: 읽고 싶은 책 목록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 김소영] 책이 책을 부른다: 읽고 싶은 책 목록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유튜브를 구독하고, 책을 읽고, 덕분에 힘을 얻고.. 나에게 김소영 작가님이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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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김소영 작가가 쓴 이 문장 때문이었다.

저는 연애할 때마다 여러 편지를 써 보곤 했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연애편지 쓰기에 시들해졌습니다. 내가 밤새워 쓴 비유와 상징이 담긴 편지를 전혀 이해 못 하는 남자에게 보내는 일이 허탈하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정말이지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나도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종종 손편지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여러 번 고민하고 작성한 편지를 받고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몇번 편지를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편지가 쓰기 싫어진다. 또한 그가 내 소원대로 써준 편지에 담긴 내용은 굳이 편지에 담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깊이가 없었고, 더 이상 편지가 받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에 살면서 가끔 한국 혹은 해외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받는다. 서로의 글씨체를 알고 집주소를 알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묘하고 좋다. 받은 편지는 집에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오며가며 보며 힘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왜 편지 받는 것을 좋아하는 거지? 편지에는 무슨 매력이 있는 거지? 자주 생각해 보아도 구체적으로 이유를 표현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편지, 서간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이런 구체적인 이유를 다 떠나서 이 책은 그냥 재밌다. 글을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읽고싶게 쓰는 것일까. 이슬아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것이다. 그리고 의사 남궁인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졌다. 의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이런 의사 선생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문장들을 남겨본다.

 

하지만 저는 사실 거의 모든 에세이집에서 약간의 징그러움을 느낍니다. 자기 얘기를 다듬고 가공해서 에세이집으로 완성하는 과정에는 좀 징그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교묘하게 포장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그렇죠.
...
제가 먼저 편지를 시작한 것은 그래서죠. 펀치 같은 편지, 즉 선빵을 날리지 않으면 친절하고 다정스런 선생님의 페이스에 말려서 제가 거짓으로 아름다운 편지 시리즈를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멋지고 징그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이슬아 작가님이 말하는 '징그러움' 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책을 읽다 보니 신기하게 이해가 간다 ㅋㅋ 

 

솔직함은 글의 매력이지만, 솔직하기만 한 글은 어딘가 폭력적입니다. 글에는 까닭 있는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가님의 글은 매번 어처구니없이 솔직했지만, 갑자기 독자를 어디론가 이끌더니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미지의 포인트를 짚어내며 끝났습니다. 마지막 단락을 읽고 “아, 잘 쓰잖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건 재능입니다.
...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임을 직면합니다. 작가님은 적어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입니다. 응급실에서 안구진탕에 시달리던 새벽 “나를 생각해주어 고맙습니다”라고 보낸 것은 그 까닭입니다
- 여러모로 징그러운 이슬아 작가님께

 

비록 이른 나이에 과로하여 허리가 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벌어야 할 돈과 이뤄야 할 야망과 수습해야 할 문제와 아직 모르는 쾌락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으니 꼭 괜찮고 싶습니다. 오래 살고 싶군요. 선생님께서도 부디 오래 사십시오.
...
아픈 사람들과 함께 병원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한 가지가 명료해졌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아프거나 괴롭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픈 곳도 괴로운 문제도 없는 날에, 그것이 어마어마한 행복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 새해의 남궁인 선생님께

 

이부분을 읽으면서 약간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최근에 아주 많이 아프면서 느끼게 된 점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아픈 곳도 괴로운 문제도 없는 날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선생님은 응급실에서 험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은 나머지 웬만한 좋지 않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상대가 놀라거나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걸 보며 얻는 커다란 만족감이 연애에는 있지 않습니까. 너무 태연한 상대의 얼굴을 보면 멱살을 잡고 싶어지죠. 좀 파괴적인 이 속성이 때때로 즐겁지 않으신가요. 파괴만큼이나 회복도 잘되는 곳이 연애의 시공간이잖아요.
...
선생님이 겪는 일들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쾌락도 고통도 정교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고통을 공부하느라 고통스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그저 몹시 꾸준하고 평이하고 안정적인 즐거움을 줘요. 그런 즐거움을 기복 없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압니다. 제가 사수하고 싶은 행복은 그런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요일 점심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 시간 말이에요. 어떤 월화수목금토요일을 보냈건 간에 일요일에는 늦잠을 잔 뒤 천천히 아침을 먹고선 후식과 함께 텔레비전 앞으로 가고 싶습니다.
...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서 점차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더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얼마든지 반복되어도 좋을 듯한 일요일 오후마다 그런 사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 간혹 스텝이 꼬이는 남궁인 선생님께

 

 

하지만 읽는 내내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이것은 훗날 남궁인의 여행에세이에 수록될 글이 아닌가? 이 원고가 남궁인의 개인 책이 아닌 우리의 공동 서간문에 실려서 더 좋을 점은 과연 무엇인가? 이 글의 수신자가 굳이 이슬아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
그러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그저 아쉬울 뿐이죠. 하필 이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쓰여지는 이야기가 서간문의 매력이잖아요. 서로를 경유한 문장을 생각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번갈아가며 자기 얘기를 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
작년 6월에 쓰신 첫번째 편지에서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이라고. 사실 저는 쭉 반대로 생각해왔답니다. 서간문의 본질은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남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이라고. 양쪽 다 진실일 것입니다. 서간문의 본질은 다양할 테니까요.
...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언젠가 선생님이 쓰셨듯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
- 남궁인 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나도 글을 읽으면서 언뜻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말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이슬아 작가님이 이렇게 딱 꼬집어서 쓴 부분이 정말 재밌었다 ㅋㅋ '남궁인 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라는 서간문의 제목조차 너무 유쾌하다.

 

내가 왜 편지 받는 것, 쓰는 것을 좋아할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돌아보고 생각해주는 것이 감사하고, 또 반대로 누군가를 돌아보며 글을 쓰는 그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편지를 쓸때마다 이 책이 자주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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